[짬] 창작판소리연구원 임진택 원장

 

임진택 원장은 지금 준비 중인 창작판소리 <안중근>에 이은 다음 작품은 <도산 안창호>가 될 것이라고 했다. 강성만 선임기자
임진택 원장은 지금 준비 중인 창작판소리 <안중근>에 이은 다음 작품은 <도산 안창호>가 될 것이라고 했다. 강성만 선임기자

 

“애국가 작사자를 도산 안창호(1878~1938) 선생으로 바로잡는 일은 넓은 의미의 친일 청산입니다. 친일·친나치 행각을 한 안익태의 애국가 곡조를 버리는 게 친일잔재 청소라면 친일파 거두 윤치호(1865~1945)가 애국가 작사자 행세를 하는 것은 친일 적폐입니다. 작사자를 바로잡아야 애국가가 세상의 존중을 받고 국민 자존심도 세울 수 있어요.”

 

문화운동가이자 판소리 명창인 임진택(71) 창작판소리연구원장이 지난해 말 펴낸 <애국가 논쟁의 기록과 진실-문화운동가 임진택의 애국가 바로잡기>(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는 뜻밖에 애국가 작사자 규명에 초점을 맞췄다.

 

“3·1운동 100년 되던 재작년에 안익태의 친일·친나치 행적과 애국가 곡조 표절 문제를 알고 애국가 곡조 바꾸기 운동을 하다 작사자가 윤치호라는 말을 듣고 작사자 문제를 공부했어요. 작사자가 윤치호라면 곡조만 바꿀 문제가 아니잖아요.”

 

그가 저술 스트레스로 평생 처음 변비의 고통까지 느끼며 완성한 책의 결론은 이렇다. “애국가 작사자가 만고의 애국자 도산에서 친일민족반역자 윤치호로 뒤집혀 있으니, 바로잡자.”

 

1990년에 <민중연희의 창조>(창비)를 내고 애국가를 주제로 30년 만에 두 번째 책을 낸 임 원장을 지난 1일 서울 종로구 인사동 창작판소리연구원에서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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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가 논쟁의 기록과 진실> 표지.

 

이승만 대통령 시절인 1955년 정부는 조사위를 꾸려 애국가 작사자 찾기에 나섰지만, 결론을 내지 못했다. 당시 조사위원 다수는 물증까지 제시한 윤치호가 유력하다고 봤지만 작사자로 확정하지는 않았다. 윤치호작 지지 쪽은 윤치호 서명이 있는 ‘애국가 가사지’, 애국가가 포함된 ‘윤치호 역술 재판 찬미가’ 등을 근거로 삼았고, 안창호작 지지자들은 도산이 1907~8년 즈음에 실제 가사를 썼다는 여러 증언과 도산이 쓴 다른 시가들과 애국가 가사의 유사성, 누구보다 열렬히 애국가 보급에 앞장선 도산의 행적 등을 내세웠다.

 

그는 이번 책에서 작사자 논증의 유력한 자료로 1945년 11월 상해에서 나온 악보자료 <한국애국가>를 들었다. 임시정부가 애국가를 알리려 출간한 이 문헌에 작사자는 ‘이름을 숨긴다’는 한자어 ‘佚名’(일명)으로 나온다. 백범은 이 문헌 주석에서 작사자를 ‘50년 전의 한 애국 지사’라고 덧붙였다. 임 원장은 이 자료에 실린 애국가 가사 ‘정성을 다하여’에 특히 주목했다. “1919년 상해 임정 수립 이후에는 ‘충성을 다하여’로 불렀지만 놀랍게도 1945년에 ‘정성을 다하여’로 돌아왔어요. 도산과 함께 활동한 독립운동가 윤형갑 선생의 손자 윤정경의 채록증언록을 보면 도산이 1907년 애국가를 처음 만들 때 가사가 ‘정성을 다하여’였죠. 백범이 도산 뜻에 따라 작사자를 숨겼지만 ‘정성을 다하여’란 가사로 도산 작임을 밝힌 거죠.” 그는 “백범이 45년 11월 환국 이후 작성을 지시한 것으로 보이는 친일민족반역자 명단에 윤치호는 이름이 상위권에 들어있다. 만약 윤치호가 애국가를 썼다면 백범이 작사자를 ‘50년 전의 한 애국 지사’라고 표현했겠느냐”고 반문했다.

 

그는 ‘애국가 가사지’ 등 윤치호설을 지탱하는 물증들도 하나하나 따지며 신뢰도에 의문을 나타냈다. “윤치호 쪽에서 처음엔 애국가 가사지를 윤치호가 1907년에 붓글씨로 썼다고 해놓고 나중에 그 가사에 1919년 이후 쓰인 ‘충성을 다하여’가 나오자 윤치호가 사망한 1945년에 썼다고 번복해요. 45년에 썼다는 가사지가 왜 반민특위가 막 활동에 들어간 48년 10월에 신문 칼럼으로 공개됐는지도 의문입니다. 반민특위 활동으로 위기감을 느낀 후손들이 뒤늦게 위조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어요.”

 

그는 2013년 국내 언론에 공개된 독립문 정초식(1896년 11월) 전단 자료 등을 근거로 도산이 애국가 후렴도 지었을 것으로 추정했다. “윤형갑 선생 구술에는 ‘밀러 학당(언더우드 선교사가 설립한 장로교 학교)의 밀러 목사님이 학생들에게 병.신년(1896년) 독립문 정초식 날 부를 노래를 짓자고 해서 학당에 다니던 도산이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됴선사람 됴선으로 길이 보전하세’라는 애국가 후렴이 들어가는 무궁화노래를 지어 선택됐다’는 내용이 나와요. 그런데 8년 전 공개된 전단을 보니 ‘(독립문 정초식에서) 각 학교 학원들이(…) 다른 애국가를 부르더라’는 내용이 있더군요. 윤 선생 증언의 신뢰도를 높이는 증거 자료이죠. 이 다른 애국가 중 하나가 18살 도산이 밀러 학당에서 만든 ‘무궁화 노래’라고 추정할 수 있어요.”

 

그는 만 60살이던 2010년 <백범 김구>를 무대에 올린 뒤로 10여 년을 ‘창작판소리 12바탕’ 완성을 위해 내달렸다. <다산 정약용>, <남한산성>, <세계인 장보고>, <오월광주 윤상원가>, <전태일>에 이어 지금은 올 현충일 공연을 목표로 <안중근>을 준비하고 있다. “80년대에 김지하 담시를 판소리로 만든 <똥바다>와 <소리내력>, <오적>을 한바탕으로 치면 <안중근>은 8번째이죠.”

 

그는 “책을 쓰며 뒤늦게 도산의 위대함을 깨달았다. 도산을 9번째 창작판소리로 만들 계획”이라고도 했다. “사실 몇 년 전만 해도 도산을 시답잖게 봤어요. 옳은 말 하고 바른길을 가지만 너무 답답하다고 봤죠. 몇 년 전 한 선배 극작가가 직접 쓴 안창호 판소리 사설을 나한테 전하며 같이하자고 했는데 그냥 돌려줬어요. ‘도산의 삶에는 파란만장과 우여곡절이 없고 생애가 너무 단순하다’는 이유를 대면서요.” 책을 끝내고는 “도산과 백범이 한국의 두 국부”라고 생각한단다. “도산은 1919년 통합 임시정부 수립에 가장 큰 역할을 했어요. 당시로는 파천황적인 국민주권 사상을 앞서 설파하고 1907년 신민회 비밀결사도 이끌었죠. 작사자 이름을 밝히면 파벌과 지방색 때문에 애국가 보급이 어렵다는 이유로 끝까지 자신의 작사 사실도 숨겼어요. 겸손하면서도 탁월한 사상가이자 조직가였죠.”

 

 

‘친일파 윤치호 애국가 지어’ 말에
애국가 작사자 논란 파고들어 책으로
안창호·윤치호설 물증 등 낱낱이 검토
“만고의 애국자 도산이 작사해” 결론

 

 

“정부, 안익태 친일·작사자 규명하고
안익태 애국가 곡조 변경도 허용을”

 

 

 

그는 재작년 4월 애국가 가사에 아리랑 곡조를 입힌 ‘아리랑애국가’를 발표하기도 했다. 애국가를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묻자 임 원장은 이렇게 답했다. “안익태 애국가 곡조는 버리고, 작사자는 정부나 국회 차원에서 규명위원회를 만들어 밝혀야죠. 애국가는 55년 이후 65년 동안 작사자 미상으로 흘러왔어요. 그 뒤에 새로 입증자료들도 나왔으니 토론이나 학술적 검토를 거쳐 작사자를 확정해야죠. 정부나 국회가 독일 쪽에 자료 요청을 해 안익태의 친일·친나치 행각도 밝혀야 합니다.”

 

그는 ‘새로운 애국가’ 보급도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비롯해 ‘아침이슬’, ‘임을 위한 행진곡’, ‘내나라 내겨레’, ‘그날이 오면’ 등은 이미 역사의 구비에서 애국가의 기능을 훌륭히 수행해왔어요. 이 노래들도 지자체나 각급 학교에서 애국가를 대신해 부를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행정자치부 국민의례규정 중 애국가 곡조를 변경해서는 안 된다는 조항을 삭제해야 합니다.”

 

 

임진택 원장. 강성만 선임기자
임진택 원장. 강성만 선임기자

 

그가 극심한 집필 스트레스를 받으며 애국가 책까지 낸 데는 이런 이유가 있단다. “내 생각과 대안으로 애국가바로잡기 운동을 해도 들으려는 사람이 없어요. 내가 애국가 문제에 대해 권위가 없어서죠. 어디서 애국가 문제로 토론해도 나를 부르지 않아요. 애국가 문제에 대표 발언권을 가지고 싶어 책을 냈죠.”

 

박정희 유신독재 시절인 1970년대 후반부터 한국 마당극 운동을 이끈 임 원장은 예순 무렵부터 창작 판소리에 열정을 쏟고 있다. 이 작품들은 안중근 열사 등이 포함된 <열사가>를 만든 박동실 명창(1897~1968)과 <성웅 이순신> 등의 작품을 만든 박동진 명창(1916~2003)에 이은 ‘3대 유파 임진택류 창작판소리’로 꼽힌다. “마당극을 오래 했지만 나만의 작품이 없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김지하 시인 이야기 모음집으로 만든 <밥> 정도 밖에 떠오르지 않았어요. 그때 판소리 밖에 다른 길이 없다고 생각했죠.”

 

애초 구상한 12바탕과 실제 결과물이 조금 다른 것 같다고 하자 그는 “입금 순서”라고 호탕하게 웃은 뒤 “시간이 지나면서 작품 구상이 달라지는 것도 이유”라고 했다. 그는 한 예로 필생의 과제인 <동학농민혁명사> 창작판소리를 들었다. “처음에는 동학을 녹두장군 전봉준 스토리로 풀려고 했어요. 그런데 뒤에 수운과 해월로 이어지는 동학사상을 반영하지 못하면 혁명의 전모를 밝히기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이렇게 동학을 단순한 농민투쟁이 아니라 세계 사상사적 사건으로 풀어 내려면 그만한 내공을 쌓아야 했죠.” 그는 앞으로 훈민정음 창제와 한글 보급 과정, 디엠제트와 독도, 바둑 이야기 등도 창작판소리로 꾸미고 싶다는 계획도 밝혔다.

 

창작판소리 작업의 가장 큰 기쁨은? “작품이 완성되는 순간이죠. 무대에서 내가 하는 표현으로 관객을 압도할 때 비로소 작품이 완성됩니다. 지금껏 100번 정도 공연한 <백범 김구>는 이제 판을 장악할 수 있어요. <춘향전> 등 옛 판소리 못지않다고 자부해요. 하지만 최근 무대에 올린 <전태일>은 아직 그 단계까지 못 갔어요. 내 판소리 중 <백범 김구>와 <5월광주 윤상원가>는 기존 판소리 다섯 바탕의 가치가 있다고 자부해요. 사설의 완성도나 음악 작창이나 분량 면에서요.”

 

그는 책 프로필에 자신을 ‘자칭 광대’라고 소개했다. 왜 굳이 ‘자칭’을 넣었을까? “광대는 한자로 넓을 광, 큰 대입니다. 저는 광대이기에는 너무 지식인입니다. 나 스스로 제일 부족하다고 느끼는 게 광대 기질이 너무 없다는 겁니다. 무대에서 웃기는 것은 천재적이지만 민중과 함께하는 거리와 현장에서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 해요. 이게 굉장히 어려워요. 판을 못 잡겠어요. 민중들과 어울리기에는 내가 너무 자의식이 강한 거죠.”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