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되는 사회적 거리두기에 벌써 탁구장 못 간 지 한 달이다. 몸은 근질근질하고 마음은 답답하기만 한데 이놈의 확진자는 줄어들지 않고 있다. 어쩔 수 없이 매일 유튜브로 탁구 시합 관람이나 탁구 쇼핑몰에서 아이쇼핑만 하다가 마침 생일도 다가오고 해서 아내에게 평소 점찍어둔 신무기(?) 라켓을 사달라고 했다. 한참 망설이다가 오케이 사인을 하긴 했는데, 자기 생일에 볼링공을 선물해줘야 한다는 조건을 달았다. (에이, 볼링공이 훨씬 비싼데, 그냥 내가 살걸...)
일반인들은 완제품을 구매해서 치거나 탁구장에 비치되어있는 라켓을 쓰지만, 우리 동호인들은 블레이드(라켓의 나무 목판)와 러버를 각각 구매해서 사용한다. 적정한 무게, 타구감, 스핀, 스트로크 강도 등등을 고려하여 물건을 선택하는데 블레이드는 대체로 4만~30만 원, 러버는 1만~9만 원까지 다양하다. 탁구공 역시 시합구와 연습구가 따로 있어서 어떤 것은 공 하나에 몇 천 원이나 한다.
나는 이번에 니타쿠 사의 카본 블레이드와 버터플라이 사의 테너지 64 러버, 티바 사의 그래스 디텍스 러버를 주문하였다. 일반인 독자들은 뭔 말인지 하나도 모를 것이므로 그냥 중상 정도 스펙의 탁구채려니 생각하시면 된다. 이렇게 조합해보니 총 20만 원 정도가 되어 나중에 아내에게 선물해야 할 볼링공 값과 거의 비슷해졌다. (손해 보는 느낌에서 탈출!)
드디어 고대하고 기다리던 라켓이 도착했다. 내 손에 맞게 손잡이 부분을 잘 깎고 나무 결을 다듬었다. 착 감기는 그립감이 마치 처음부터 내 팔의 일부분인 것 같이 느껴진다. 갓 태어난 아기를 달래듯 살살 스윙을 해본다. 앞 뒤 옆 옆 잔발 연습과 함께 '이제 다 죽었어~' 드라이브 헛스윙도 해보며 외쳐보기도 한다.
그런데 가만 보니, 몇십 개의 이상한 탁구공이 라켓과 함께 딸려왔다. 하얀 공 표면 위에 빨간 점이 몇 개 찍혀있다. 아마 시합구는 아닐 듯싶다. 페친 고고탁님이 쇼핑몰 쥔장이시라 댓글로 여쭈어봤다. 알고 보니 서브 연습구였다. 빨간 점은 서브 시 스핀이 어느 정도인지 판단하기 위함이라 한다.
테이블 위에 탁구공을 놓고 한 번 돌려본다. 엄지와 검지가 만들어낸 스핀 에너지에 공이 톡톡 튀면서 힘차게 자전한다. 이 가볍고 하얀 탁구공이 초당 50~100 rpm으로 강하게 회전하며 상대방 테이블로 꽂힐 때의 짜릿함이 탁구를 나의 인생 스포츠로 만들어주었다.
10여 년 전에 처음 생활체육 탁구계에 입문하였을 때, 나는 기고만장했었다. 회사 내에서 나름 제일 잘 친다는 자부심이 있었고, 고교 때까지 엘리트 선수 시절을 보낸 아내가 가끔 원포인트 지도도 해주었기 때문이었다.
"저쪽에 계시는 여사님과 한 번 쳐보세요"
가입한 첫날 탁구클럽 총무가 구석에 있는 할머니 한 분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아, 이왕이면 제일 잘 치는 사람하고 붙이지, 저런 힘없는 구석 할매랑 시합을 하라고 하냐... 나는 투덜거리며 구석 테이블 쪽으로 갔다.
이거 핸디를 몇 점 줘야 하나... 멍청하게 딴생각을 하고 있던 내게 구석 할매(?)는 빙긋 웃으며 몇 부냐고 물어보셨다. 몇 부?? 그게 뭐지? 난 생체 탁구 레벨을 전혀 몰랐기 때문에 얼떨결에 중간급은 될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
할매는 그럼 처음이니 핸디 없이 그냥 치자고 하였다.
드디어 내 생애 첫 생활체육 시합이 시작되었다. 뭐 뭐냐...이 서브는? 지금까지 본 적 없는 강한 너클 성 서브가 할매의 손에서 마치 만화 드래곤볼의 에너르기 파처럼 퓩~하고 날아왔다. 연달아 두 점을 내주었다. 당황한 나는 심기일전하여 특유의 강한 회전 서브를 넣었다. 뭐 뭐냐... 이 스트로크는? 역시 회사 내에서 절대 볼 수없었던 강렬한 스매싱이 테이블의 좌우 사이드를 때렸다. 순식간에 점수는 11대 2...(두 점도 엣지와 무대뽀 스매싱 하나로 얻어걸린 것임)
3세트, 소위 3 빵으로 지고 씩씩대며 다시 도전... 그렇게 3게임을 쳤는데 모두 3 빵.
나중에 알고 보니 할매의 부수는 지역 5부(그때 필자의 실력은 대충 8부~9부 정도 되었을까)였는데, 그 정도 치게 되면 웬만한 학교 탁구, 군대 탁구, 회사 탁구 등 마이너리그 탁구 최고수보다 5배는 더 잘 치는 수준이었다.
쓰라린 가슴 안고 집으로 향하는 나의 발걸음은 무거웠다. 계속해야 되나, 말아야 되나? 막걸리 한잔하며 아내에게 말을 했더니 생체 시합을 나가려면 정규 레슨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그 이후, 몇 년간 레슨도 받고 열탁 하여 지금 그 할매 수준에 간신히 올랐다. 그리고 탁구를 오래 칠수록 겸손해졌다. 어느 구장이나 같은 레벨에서도 나보다 잘 치는 플레이어가 존재했고 지역 시합에 나가면 만만한 이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또 하나, 재미있는 것은 탁구장 내에서는 기존 사회에서의 지위나 부, 학식, 연령 따위는 아무 쓸모없다는 것이다. 무조건 실력 있는 사람이 권력자이다. 한 부수 위 플레이어는 하느님과 동격이다. 그래서 시합 한 번 뛰어주면 음료수 한 병 갖다 바치며 감사하다고 인사도 깍듯이 해야 한다. 아마도 프렌치와 라벤의 권력 유형 중 전문적 권력(expert power)이 여기에 해당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아, 그러고 보니, 가장 가까운 곳에 강력한 권력자가 계신다. 고교 때까지 탁구선수였던 아내.
아내와 나의 부수 차이는 무려 6 레벨... 이 정도면 거의 하늘과 땅 차이다. 생각해보니 여신이네... 앞으로 말 잘 들을게 여봉!
하루빨리 코로나 19가 진정되어 탁구장에 가고 싶다.
- 9월 초 용모 생각